
금강산 벼락맞은 오동나무로 만든 거문고-20140818 연합뉴스 | |||||||
성호기념관 | 2015/01/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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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벼락맞은 오동나무로 만든 거문고기사입력 2014-08-18 10:59
성호 이익의 형이 제작·사용한 옥동금 중요민속문화재 예고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을유년 봄에 여성(驪城) 이숙도(李叔度)가 황화방(皇華坊)의 사관(舍館)으로 나를 찾아와서 거문고 하나를 보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는 우리 할아버지 옥동 선생(玉洞先生)이 지녔던 것입니다. 선보(善甫)라는 사람이 (금강산) 만폭동에 들어갔다가 바위 위에 벼락맞아 말라 버린 오동나무를 보고는 좋은 재목이라 생각해서 가지고 와서 선생께 드리니 선생께서 그것으로 거문고를 만들고 시를 지어 새기니 세상에서 이를 군자금(君子琴)이라 했습니다.'" 조선 말 고종시대에 홍문관교리·영흥부사·우승지 등을 지낸 이남규(李南珪.1855~1907)라는 사람의 시와 글을 모은 문집 수당집(修堂集) 중 권1에 수록된 '군자금가'(君子琴歌)에 실린 대목이다. 이 글에서 이남규는 이 거문고의 풍상을 다음과 이어간다. "그 뒤에 집안에서 보존하여 전하지 못하고 남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선인(先人)의 뜻을 말하고 울면서 그에게 이야기하여 돌려받아 보니 재목은 파손되고, 줄이 좀먹고, 기러기발이 이지러졌으며, 아직도 남아서 볼만한 것은 낡은 바탕뿐이었습니다. 족인(族人)인 기거랑(起居郞) 학수 씨가 이를 안타깝게 여겨 급히 사람을 시켜 수리하니, 아교로 붙이고 줄을 갈고 기러기발을 보충하니 비로소 옛날의 거문고 모양이 회복되었습니다." 이 거문고가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의 여주이씨(驪州李氏) 문중에 전하다가 2011년 11월12일 안산시에 기증해 지금은 이곳 성호기념관이 소장한 옥동금(玉洞琴)이라는 악기다. 문화재청이 제작 내력과 그것을 수리한 기록이 명확한 이 거문고를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 예고했다고 18일 밝혔다. 지금은 옥동금(玉洞琴)이라 일컫는 이 거문고는 성호의 셋째 형인 옥동(玉洞) 이서(李서<삼수변+敍>. 1662~1723)가 만들어 연주하던 것이다. 문화재청은 이 거문고가 "제작 시기와 사용자가 분명하여 18세기 초 우리 악기의 모습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유물"이라고 평가했다. 오동나무 재질에 길이 175㎝, 높이 23㎝인 옥동금 뒤판에는 소장자였던 이서의 친필을 집자(集字)한 '玉洞'이라는 글자와 효언(孝彦) 윤두서(尹斗緖.1668~1715)의 아들 낙서(駱西) 윤덕희(尹德熙.1685~1776)가 쓴 다음과 같은 시가 새겨져 있다.
"금강산 만폭동은 그윽이 세상과 떨어진 곳 거기에 있던 오동나무로다. 신명이 아끼던 곳에 사(邪)가 끼어들고 해쳐 신이 노여워 벼락쳤도다. 내 벗 선보가 나에게 맡겨 두드려 보고 진가를 알아 이 멋진 금을 완성했도다. 밖으로 음양(兩儀)을 갖추고 그 속에 온갖 이치 숨기고는 오성육률(五聲六律)로 하늘의 마음을 깨닫는도다. 막히고 답답함을 후련히 털고 요사스러움 음탕함을 씻어내며 한 생각의 어그러짐도 이에서 삼갔도다. 억제도 이로써 하고 펴기도 이로써 하니 이것이 곧 나의 금이로다." 문화재청은 한달 동안의 지정 예고기간에 수렴된 의견을 검토해 문화재위원회 재심의 절차를 거쳐 중요민속문화재 지정 여부를 최종 확정할 방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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