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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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 선생은... 온화하고 순수하며 화평하고 즐거운 듯 미소 띤 얼굴은 친근하여 봄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고, 곧고 엄정한 말씨는 엄격하면서도 말은 기백이 놓고 간결하여 가을 햇살 같았다. -제자 윤동규

성호이익

성호이익영정 - 당쟁의 재앙과 환난, 가난과 병고속에서도 성호는 100권의 저술을 이뤄내고, 조선후기 사상사 속에서 빛나는 별 같은 제자를 길러 낸 초인이었다.
성호이익영정
당쟁의 재앙과 환난, 가난과 병고 속에서도 성호는 100권의 저술을 이뤄내고, 조선후기사상사 속에서 빛나는 별같은 제자를 길러낸 초인이었다.
조선후기 실학자, 성호이익 큰 스승, 위대한 삶의 맥

그는 1681년(숙종 7) 신유년 10월 18일 아버지 이하진의 유배지(流配地)인 평안도 운산(雲山)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는 성호가 두 살 되던 1682년(숙종 8) 임술년 여름, 향년 55세로 귀양이 풀리지도 않은채 그곳에서 세상을 버렸다. 이처럼 성호의 생애는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작되었다.

어린 성호를 키운 것은 편모인 권씨부인이었지만 그를 학문의 세계로 이끈 것은 둘째 형님 섬계공(剡溪公) 이잠(李潛)이었다. 스물 두 살 터울로 마치 어버이 같고 스승같던 이 형님마저 성호의 나이 26세 나던 1706년(숙종 32) 진사의 신분으로 서인(西人) 중신(重臣)의 잘못을 임금께 상소했다가 역적으로 몰리어 곤장을 맞고 작고하였다. 연이은 당쟁의 환난(禍難)이었다.

성호는 이보다 일년전인 1705년(숙종 31)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답안지[科紙]에 적은 이름[錄名]이 잘못되었다는 빌미로 제2차시험인 회시(會試)에 조차 나가지 못하였다. 이 사건 이후 그는 과거를 아예 작폐한 채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이같은 일들을 일러 다산 정약용은 “성호선생께서 집안에 화를 당한 뒤로 이름난 학자가 되셨으니, 권세있는 부호가의 자제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라고 기록했다.

그가 33세 나던 1713년(숙종 39)은 성호의 생애에 있어 대단히 의미있는 한 해였다. 기다리던 외아들 맹휴가 태어나고 본격적인 저술 활동이 시작된 해였기 때문이다. ‘질서(疾書)’의 시작인 『맹자질서』는 이 해에 완성되었다. 성호의 학문이 알려져 많은 제자들이 안산으로 찾아든 것은 그의 나이 30대 부터였다. 또한 47세 때에는 나라에서 그의 학문과 덕행(德行)을 듣고 몇 차례 벼슬을 내리고자 불렸으나, 한번도 이에 응하지 않고 성포동에서 농사지으며 학문에만 정진하였으니, 그가 주장한 ‘사농합일(士農合一)’ 즉, ‘선비는 농사로서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철저히 실천한 셈이다.

본래 병약했던 그가 등과 가슴에 악성 종기가 심해지기 시작한 것은 60대 이후였다. 외아들 맹휴도 같은 증세로 39세에 젊음을 버렸으니, 이 병은 성호가의 고질이었던 듯하다. 수많은 친족에 대한 보살핌과 자신의 병을 다스리는 동안, 이미 가산은 탕진되어 나중에는 ‘송곳조차 꽂을 단 한 평의 땅도 없을’ 정도로 경제적 몰락과 모고(困苦)를 겪게 되었으나, 이런 고통 속에서도 83세로 이승을 버리기까지 세상을 위한 실용·실증의 학인 경세치용의 학문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그가 83세 되던 1763년(영조 39), 영조는 고령의 노인을 우대하는 나라법에 따라, 성호에게 정3품 당상관직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의 벼슬을 내렸다. 세상을 떠나기 몇 개월 전의 일이었다. 같은 해(1763) 11월, 병상에 들어 12월 섣달 17일, 정침에서 임종했으니 향년이 83세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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