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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 선생은... 온화하고 순수하며 화평하고 즐거운 듯 미소 띤 얼굴은 친근하여 봄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고, 곧고 엄정한 말씨는 엄격하면서도 말은 기백이 놓고 간결하여 가을 햇살 같았다. -제자 윤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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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긍의 목재 이삼환 제문
성호기념관 2010/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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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긍의 목재 이삼환 제문
박효긍의 목재 이삼환 제문

박효긍의 목재 이삼환 제문/朴孝兢 木齋公 祭文


Memorial address for deceased Yi by Park Hyo-keung


1814년(순조 14), 50×35cm


 

박효긍(1757~1818)의 자는 사옥(嗣玉) 또는 집경(執敬). 본관은 밀양으로 고향은 충청도 덕산(德山)이며 소북(小北) 집안 출신이다. 외조부는 정산(貞山) 이병휴(李 秉休)이고, 아내 하동정씨는 소북파(小北派) 실학자인 농포(農圃) 정상기(鄭尙驥, 1678~1752)의 증손녀이다. 1801년에 사마시에 합격했다. 박효긍은 이삼환의 생질 로 같은 마을에 살면서 학문을 전수받았다. 1795년 정약용은 충청도 금정찰방(金井 察訪)으로 좌천되어 와서, 이삼환·이도명(李道溟) 등 이 지역의 학자들과 많은 교유를 가졌는데, 특히 온양 봉곡사(鳳谷寺)에서는 이삼환을 좌장으로 총13인이 모여 성호의 저작들을 간행할 생각으로 교정과 강학(講學)이 이루어졌다. 박효긍도 이 모임에 같이 참여했던 인물이다. 이 글의 서두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아! 부귀와 자손과 청명(淸名) 세 가지는 사람들이 하고자 하는 바이나 겸하여 가진 자는 드물다. 소자가 일찍이 선생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었다. “부귀를 누리고 아들을 많이 두는 것은 진실로 길상이요 좋은 일이나, 이것은 운명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청명에 있어서인즉 덕을 닦고 힘써 행하는 자는 모두 힘써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소자는 매번 이 말씀을 세 번 반복하였다. 이제 선생이 돌아가심에 다만 일단의 청명을 남기셨으니, 어찌 나에게 있는 것은 가능하고 불가능한 것은 운명이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 선생께서는 빼어난 자질로 재야에서 경서를 궁구하였으나 세상의 쓰임을 얻지 못하였고, 하늘이 낸 효심으로 힘을 다해 봉양하였으나 끝내 어머님께 근심을 끼치고 말았으며, 재물을 가벼이 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여 빈궁한 이들을 구제하는 마음 때문에 만년에 또한 자신이 궁핍해져 밥 지을 것을 걱정하게 되었으니, 하늘은 어찌 이다지도 공의 운명에 인색하여, 이리도 심하단 말인가!


嗚呼! 富貴也子孫也淸名也三者, 人所願欲, 而兼而有之者鮮矣. 小子嘗聞之先生曰,“享貴富, 多子姓, 固是吉祥善事, 此則有命. 至若淸名, 修德勵行者, 皆可力致.” 小子每三復斯言. 今先生之歿也, 只留得一段淸名, 豈非以在我者可能, 而所不可能者命也耶. 嗚呼, 先生以高世之姿, 窮經林下, 而不得需世之用, 以出天之孝, 盡力致養, 而終貽北堂之慽, 以輕財好施, 濟貧恤窮之心, 晩又私計剝落, 關慮, 天何嗇公之命, 至此之極也!


 


이어서 선생의 명망이 워낙 높았기에 유림장(儒林葬)으로 치르려 했으나 가족들이겸양하여 사양했다는 사실을 쓰고, 또 박효긍 자신은 목재공의 문하에 일찍 나갔으나,중간에 과업(科業)으로 오래 선생의 문하를 떠나 있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선생을 찾으니 이미 칠순을 넘으셨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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