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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 선생은... 온화하고 순수하며 화평하고 즐거운 듯 미소 띤 얼굴은 친근하여 봄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고, 곧고 엄정한 말씨는 엄격하면서도 말은 기백이 놓고 간결하여 가을 햇살 같았다. -제자 윤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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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양 정산공 제문
성호기념관 2010/03/29
첨부  이기양_정산공_제문.jpg
이기양 정산공 제문
이기양 정산공 제문

이기양 정산공 제문/李基讓 貞山公 祭文

Memorial address for deceased Yi by Yi Ki-yang

1778년(정조 2), 50×37cm

 

이기양(1744~1802)의 자는 사흥(士興), 호는 복암(伏菴). 본관은 광주(廣州)로 한 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의 7대손이다. 이가환·권철신·홍낙민과는 사돈이 되며 교유가 두터웠다. 1774년 진사시에 장원을 하고 현감을 맡았다가, 1795년 문과에 급제하여 부수찬·승지·의주부윤 등을 지냈다. 1800년에는 진하부사(進賀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는 채제공을 이어갈 남인의 신진 기예로, 이가환·정약용 등과 함께 정조(正祖)의 지우를 입었으나, 1801년 신유사옥이 일어난 후 아들 총억(寵億)과 사돈들이 모두 천주교 신자였던 것에 연루되어 단천(端川)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복암유고』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때문에 스승인 정산 이병휴에 대한 제문인 이 글은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하겠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維歲次戊戌九月丁亥朔二十一日丁未, 門人廣陵李基讓, 敢昭告于先師貞山李先生靈座之前曰, 嗚呼, 小子離此土甫三歲, 然丙申春, 小子奉先府筵 趨南川, 復自南川始至此土, 入鄕國, 望里閭, 小子已不禁掩袂泫然, 心肝寸割, 然獨幸有先生歡欣迎接, 使小子得有以憑依慰釋者. 及其年八月小子復從南川來時, 則先生已棄世矣. 於是向之所憑依慰釋者, 遂不可復得矣. 然殯 在焉, 小子心目, 猶尙有膽忽如在者矣. 至丁酉秋復來, 又不見殯 矣, 於是乎, 雖欲求向之斫瞻忽如在者, 亦不可得矣. 然筵 不撤, 猶可得以拜 呼 , 以小洩心胸寃憤憑 之氣矣. 今日來此, 又不見筵 矣, 於是乎, 小子風樹之痛, 梁 之悲, 皆無處依籍慰瀉, 而舊痛新哀, 沓 積, 只不覺彷徨瞻望, 如失如求, 不自定而已. 嗟乎, 三歲一瞬也, 而孰謂其間人事之變遷, 悲凉一至此哉. 尙記甲午冬, 小子登進士而歸也, 先生心甚歡喜, 與我先人對席酬樽, 喜形於色. 今小子猥蒙國恩, 得添斗祿, 而有子路不逮養之痛, 無樂正喜不寐之慶. 人生至此, 雖木肝石賜, 寧不盡然而自傷乎. 七月爲謝恩命, 至都下, 因値科試, 遂不得來赴終祥執事之列. 今趨 日 始脫直來訣, 庶幾先生鑒此微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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