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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범조 「증목재이자목서」
성호기념관 2010/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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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범조 「증목재이자목서」
정범조 「증목재이자목서」

정범조 「증목재이자목서」/丁範祖 「贈木齋李子木序」


Preface of Yi Sam-hwan's writings Donated by Chung Bum-jo


연도미상, 84×33cm


 

이 글은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 1723~1801)가 목재(木齋) 이삼환(李森煥, 1729~1813)에게 준 증서(贈序)로『해좌집』권19에도 실려 있다. 정범조는 시와문장에 뛰어나 사림의 모범으로 명성을 얻었고, 또 이로 인하여 영조와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특히, 문체반정(文體反正)에 힘쓰던 정조에 의하여 당대 문학의 제1인자로 평가되어 70이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문사(文辭)의 임무를 맡았다.


이삼환은 정범조나 다산 정약용 등으로부터 문학과 경학에서 큰 스승으로 인정받 기도 했다. 이삼환은 사상적으로는 정학(正學)을 고수하였지만, 그의 문학은 결코 판에 박힌 것이 아니었고 보수적이지도 않았다. 그는 21세와 22세 되던 때에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결국 등과(登科)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공령문(功令文)은 대가들에 못지 않았다고 한다. 이삼환의 학문적 자질을 아껴서 손자와 똑같이 사랑하였다고 한다. 1763년 성호선생을 여의고, 이듬해에는 아내 권씨 부인과 중형 창환(昌煥)을 잃었으며, 1765년에는 생모인 정씨 부인을 여의었다. 또 이 무렵 외아들마저 잃었다. 어려서부터 병약한데다가 이처럼 여러 번의 상을 당하는 동안 더욱 기력이 쇠하였으므로, 스스로 과거를 통한 출세의 길에 뜻을 끊었다고 한다. 정범조 글의 일부를 본다.


 


···내 친구 목재(木齋) 이자목(李子木)은 내가 어렸을 때 그가 친구 한경빈(韓景賓)의 죽음을 애도하여 관(棺) 앞에 글을 써서 슬픔을 고한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마치 명나라의 왕원미(王元美: 王世貞)가 친구 종자상(宗子相)을 애도하는 글과 같아 진실로 그가 못사람들과는 다른 무엇이 있음을 알았다. 근래 또 자목(子木)의 사위 유군(兪君)으로부터 그가 지은 시가(詩歌)와 고문(古文) 등 10여 편을 보고서 또한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지난 겨울 내가 객으로 한양 남쪽의 저동(苧洞)에 묵을 때, 등 아래서 문으로 들어와 나에게 읍(揖)을 하는 이가 있었는데 바로 자목(子木)이었다. 그와 더불어 담소함에 그가 가진 것을 다 나오게 하였더니, 아래 위로 수천 수백년의 운세(運世)의 박복(剝復: 治亂興衰의 기운을 이름)과 문장의 쇠왕(衰旺)을 손바닥을 치며 정밀하고도 넓게 논하는 것이 마치 매달린 거울이 비추는 듯하고, 종의 울림과 같았다. 이윽고 금방 웃으며 농담도 하게 되었는데, 간간이 강개함이 또 일어나 정(精)하고도 상쾌함이 온방에 가득하였다. 이에 나는 크게 놀라 나도 모르게 무릎이 그의 앞으로 나가게 되었다. 비록 그러하나 자목(子木)의 모습을 보니 나이가 들어 쇠락한 얼굴이었고, 귀밑머리는 하얗게 되었으며, 짚신에 포의 차림인 여전히 한 서생(書生)일 따름이었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余友木齋李子木, 余少時得見其悼友人韓景賓之死, 而抵書柩前 以告哀, 若王元美之哭宗子相者, 固識其有異於衆人. 近又從子木女 兪君, 見其所作詩歌古文十數篇, 又識其所存, 有不可測者. 去年冬, 余客宿城南之苧洞, 燈下有闖戶入揖余者, 子木也.與之談, 使盡出其所有, 則抵掌上下數千百年運世之剝復, 文章之衰旺, 精識博論, 如懸鏡而照, 叩鍾而應, 已而諧笑, 間作感慨橫生, 精爽滿室. 余乃大驚, 不覺膝之前也. 雖然, 視子木菁華凋脫, 颯然霜 而芒 布衣, 猶是一書生, 此何爲也?


 


이 글은 덕산(德山: 지금의 충청남도 예산)으로 돌아가는 이삼환을 위한 송서(送序)의 글이다. 글 말미에서 정범조가 밝혔듯 한퇴지(韓退之)가 맹동야(孟東野)를 보내는 착잡한 심정으로 글을 써내려 가고 있다. 이 글에는 경세제용의 학식과 수완을 가진 훌륭한 인물이 시골에서 묻혀 재능을 써보지 못한 채 잊혀져 가는 그 불우함에 대한 아쉬움이 문면에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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