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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 선생은... 온화하고 순수하며 화평하고 즐거운 듯 미소 띤 얼굴은 친근하여 봄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고, 곧고 엄정한 말씨는 엄격하면서도 말은 기백이 놓고 간결하여 가을 햇살 같았다. -제자 윤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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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탁 간찰
성호기념관 2010/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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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탁 간찰
김성탁 간찰

김성탁 간찰/金聖鐸 簡札/Letter written by Kim Sung-tark


1724년(경종 4), 35×28cm


 

제산(霽山) 김성탁(1684~1747)이 성호 이익의 후손에게 보낸 편지이다. 김성탁은 본관이 의성(義城)으로 1735년(영조 11)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수찬(修撰)을 지낸 영남 지방의 이름난 학자이다. 편지의 앞부분에는 김성탁이 부친의 병환과 집안의 이어진 상사(喪事)를 안타까워하고, 이어 지난해 상사(上舍) 이정휴(李井休, 후에 귀환(龜煥)으로 개명(改名))가 자신에게 부탁한 섬계공(剡溪公) 이잠(李潛, 1660~1706)에 관련된 추모 사업에 대해, 명성도 벼슬도 없는 자신같은 시골 선비가 감당할 일이 아니라며 사양을 하고 있는 내용이다.


섬계공 이잠은 성호 이익의 둘째 형으로, 1706년(숙종 32) 왕세자를 모해하려는 김춘택(金春澤) 일당을 제거하지 않으면, 종사(宗社)가 위태롭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이것이 문제가 되어 장살(杖殺)을 당하였다. 1723년(경종 3)에 신원(伸寃)되었는데, 이 편지를 통해 보건대 그 후손이 김성탁에게 『섬계유고』의 서문을 부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편지의 중간에는 “무릇 섬계공의 고풍준절은 한 시대를 놀래켰으니, 몸은 비록 불행을 입었으나 종묘사직을 부지하고, 떳떳한 윤리강상을 세운 그 위대한 공은 무고할 수 없는 것이다. 국가에서 요사이 포증의 은전을 내리고 사림들은 시축의 의례를 행하니 당세의 덕망있고 문필있는 군자들이 또한 노래로 퍼뜨리고, 비지(碑誌)·전장(傳狀)에다 실어 섬계공의 혁혁한 성광(聲光)·의열이 천만세에 이어질 것이다.” (夫剡溪公高風峻節, 驚動一世, 身雖不幸, 而扶社稷樹倫彛之功, 卓乎其不可誣. 國家近有褒贈之典, 士林又擧尸祝之儀, 而當世名德秉筆君子, 亦將播之歌詠, 載之誌傳, 使剡溪公聲光義烈赫赫流於千萬世)라고 하여 섬계공의 공훈을 칭양하고, 이어 자신이 젊어서 섬계공의 상소문을 읽어보고는 그 사람됨이 진동(陳東)·구양철(歐陽徹)보다도 뛰어남을 느꼈었다고 말하였다.


또 편지의 끝에는, “들으니 섬계공의 아우 처사 이익(李瀷)씨가 문학과 행의로 서울에서 크게 이름을 떨치고 있다하는데, 그대는 한번 만나보았는지요? ”(聞剡溪之弟李處士瀷氏文學行誼, 爲京洛間大段云, 未知高明亦嘗有應否) 라는 구절이 있다. 김성탁의 이 간찰은 그의 『제산집』에는 보이지 않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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