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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 선생은... 온화하고 순수하며 화평하고 즐거운 듯 미소 띤 얼굴은 친근하여 봄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고, 곧고 엄정한 말씨는 엄격하면서도 말은 기백이 놓고 간결하여 가을 햇살 같았다. -제자 윤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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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혜숙의 위대한 열정을 찾아서8-경지는 깊고 길은 가까워라 성호 이익 경기도 안산 성호기념관-20141024 영남일보
성호기념관 2015/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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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혜숙의 '위대한 열정을 찾아서' .8] 경지는 깊고 길은 가까워라, 성호 이익-경기도 안산 성호기념관


 


류혜숙객원기자

2014-10-24 08:18:04





일하지 않는 선비는 ‘좀벌레’ 라고 하셨지요


















 





성호 이익의 흉상(오른쪽).그 옆으로 다산 정약용의 ‘성호선생 찬’이 쓰여져 있다.











 

성호기념관.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소개하는 전시실, 실학정보실, 성호학당 등이 있다.











 

성호 이익의 재실 경호재와 사당 첨성사.











 

성호 이익의 묘소. 1985년 민족문화를 빛낸 사상분과 10인의 선현으로 선정되어 묘역이 정비되었다.










선비란 무위도식의 다른 이름이요, 일하지 않는 선비는 좀벌레다. 이 지엄하고 짜릿한 언사는 누구의 것인가. 조선 후기의 선비 성호(星湖) 이익의 것이다. 우리나라 실학사상의 원류이자 모든 학문에 능통했다는 성호. 그 모든 학문적 몰두와 성과 이전에 선생에게는 하나의 질문이 있었다. 좀벌레가 인간으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선비가 할 일은 무엇인가.





◆학자의 일생, 실학의 대종을 이루다



성호 이익은 숙종 7년인 1681년, 아버지 이하진의 유배지인 평안도 운산에서 태어났다. 이듬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선영이 있는 안산의 첨성리(현 상록구 일동)에서 살았다. 둘째 형 이잠(李潛)에게서 글을 배웠고, 이후 형이 당쟁으로 희생되자 선생은 벼슬할 뜻을 버리고 평생 첨성리에 칩거했다.







선생은 퇴계 이황을 잇는 남인 계열의 학자로 율곡 이이와 반계 유형원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성호사설’과 ‘곽우록’ 등 100여 권의 저술을 남겼는데, 당시 사회에 대한 실증적인 분석과 비판, 그리고 정책적인 대안을 제시한 것이었다. 분야는 정치, 경제, 지방제도, 과거제도, 학제, 병제, 관제 등 광범위했다. 그의 관심은 천문, 지리, 의학에도 닿아 있었다. 선생은 지동설을 수용했고 지구와 달, 태양의 크기와 궤도를 수학적으로 인식했다. 또한 일식은 미신이 아닌 천문현상이며, 계절의 변화는 경도차가 아닌 위도의 차이임을 주장했다.







성호 이익의 학문과 사상은 안정복, 이가환, 이중환, 정약용 등에게 계승되었다. 특히 정약용의 ‘다산학’은 ‘성호학’을 나침반 삼은 것이었다. 다산과 같은 남인 지식인들에게 성호 선생은 하나의 기원이었다. 선생이 살았던 첨성리 인근에 ‘성호기념관’이 있다. 전시실에는 선생의 학문과 실학사상, 친필 시고, 개인 저작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입구에는 다산이 쓴 ‘성호선생 찬’이 적혀 있다. ‘문호는 지극히 바르고, 법도는 지극히 엄격하시며, 길은 지극히 가깝고, 경지는 지극히 깊으시다.’ 그것은 학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선비의 일생, 안빈(安貧)



선비란 무엇인가. 사실 선생의 시대에 선비는 좀 애매했다. 책 읽고 글 쓰는 일이 선비의 주업이지만 글의 생산이 밥을 생산하지는 못했다. 18세기 조선에서 문장이 밥이 되려면 관직으로 나가야 했다. 책만 읽는 선비는 가난했다. 녹봉도 없고 생산도 하지 않으니 당연했다. 사회적 지위를 잊어서도 안 되었고, 그렇다고 특별한 권리가 있지도 않았다. 선생은 현실을 직시했다. 그에게 선비는 무위도식하는 자, 존재 자체가 민폐인 자, 좀벌레이자 곧 백수였다.







‘열흘 동안 준비한 비가 하루아침에 내리니… 농사일 때 놓칠까 촌각을 서둘러 논밭에 나간다/나만 홀로 사지를 부지런히 움직이지 못하니/집안에 앉아 음식 대하매 먹고 사는 게 부끄럽네.’(농가의 반가운 비)







선생에게는 물려받은 땅이 있어 끼니는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선비가 타인의 노동으로 살아도 되는 어떤 자격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선비라는 무능과 농민들에 대한 미안함을 늘 의식했다.



‘온몸에 종일토록 땀이 줄줄 흘러내리니/부채질이 제일 좋은 것 잠시도 쉬지 않는다/여름 들판의 일꾼들 고생에 생각이 미치니/초가집 비록 좁아도 괴로워하지 말아야겠네.’(혹심한 더위)



선생에게 있어 선비의 윤리는 안빈이었다.







◆식소(食小)와 삼두회(三豆會)



그러면 선비가 최소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절약과 검소다. 선생의 절약법은 매우 구체적이었다. 첫째, 끼니마다 한 홉씩 줄여먹기. 그는 ‘한 사람이 하루에 두 그릇을 먹으니 두 홉이 절약되고, 한 집이 열 식구라면 하루에 두 되, 한 고을이 1만 집이라면 2천 말의 식량을 저축할 수 있다’(식소)고 했다. 한 홉의 배고픔으로 죽지 않는다. 저축한 곡식은 굶주려 죽는 이들을 구제할 수 있다.







둘째, ‘콩죽 한 사발과 콩나물 김치 한 접시, 된장으로 만든 장물 한 그릇, 이름하여 삼두(三豆)’다. 선생은 콩은 흔하지만 기근을 구제하는 데 유용하고, 콩으로 죽을 하면 20일치를 30일 동안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선생은 창고에 남는 곡식이 있더라도 일 년에 한 번은 열흘에서 보름 동안 친척들이 모두 모여 ‘삼두회’를 실천하자고 제안했다. ‘어른과 아이가 모두 모여서 배불리 먹고 파하였으니, 음식은 박하지만 정의는 돈독하였다. 대대로 규범으로 삼도록 전하고 폐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삼두회시 서문) 선생의 일상 밥상 역시 언제나 검약했고, ‘적은 양의 콩밥과 새우젓 그리고 나박김치를 잡수셨다’고 안정복은 전한다.







35세 되던 해 어머니를 여의자 선생은 노비와 집기를 모두 종가로 돌려보냈다. 47세 되던 해에는 조정에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가세는 퇴락해갔고, 만년에는 송곳을 세울 만한 땅도 없을 만큼 영락했다 한다.







◆종이로 염하라



선생은 83세 되던 1763년 12월17일 오랜 병고 끝에 세상을 떠났다. 성호 기념관 2층 복도의 창밖으로 선생의 묘소가 보인다. 선생의 저서 ‘성호전집’에는 자신의 염습법이 적혀 있다.







‘종이로 이불을 삼는 것은/마공의 명시에 실려 있고/종이 이불로 염습하는 것은/누군가 말한 바 있지/물건은 하찮아도 쓰임은 귀중하니/가난한 집에 적합하도다/나는 이것을 따를 것이니/자손들은 알아야 하리.’







노동하지 못한 선비, 그러므로 자신을 살게 해준 이들에게 예의를 지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철저히 실천하는 것. 그것이 선생이 지킨 선비의 자의식이었다. 경지는 깊고, 길은 결코 먼 것이 아니었다. 시인 강준흠은 ‘선생의 옛 집을 지나며’ 이렇게 썼다. ‘아직도 선생의 저술은 많이 남아 있는데/여전히 오늘날 대도(大道)는 황폐해 갈 뿐.’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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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구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안산으로 가는 버스가 있다. 성호 기념관은 안산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택시로 5분, 도보로 20분 내외 거리다. 기념관 맞은편 언덕에 선생의 묘와 재실이 위치하고 기념관 앞에는 성호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기념관 입장료는 어른 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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